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보름쯤 된 날이었다. 할 때가 됐는데 며칠 째 생리를 하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밤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생리를 하며 안심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진열된 임신테스트기 중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그날 밤 은정 씨는 새벽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인터넷에서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답변을 본 적이 있었다. 잠을 보채다 눈을 떠보니 오전 5시. 테스트기의 조그만 네모 속 ‘두 줄’은 더없이 선명했다.
전 남친이 수소문해 겨우 찾아낸 낙태병원
의사는 60대 남성이었다. 여의사이길 바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음파 화면 속 ‘점’을 바라보던 20대 남녀에게 의사가 무심히 말했다. ‘점’이 태아였다. 비용은 총 90만원
수술실 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수술대에 앉았다. 양쪽 지지대에 종아리를 올리니 다리가 120도 각도로 벌어졌다. 상체는 뒤로 젖혀졌다. 배꼽 아래로는 분홍색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커튼 뒤에서 의사가 수술용 고무장갑을 끼는 듯 했다. 간호사는 주사기와 수술 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리하고 차가운 금속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간호사가 쇠로 된 그릇에 뭔가를 떨어뜨리는지 ‘딸각’ ‘딸각’ 소리가 났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 오는길에 버스에서 홀로 오한에 떨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엄마 생각이 간절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자취방에 오자마자 보일러를 틀었다.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끓여놓은 미역국은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냉기가 가시자 고열이 왔다. 얼굴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2년 전 그 일 이후 아직 ‘솔로’로 지낸다. 성관계는 물론 남자를 사귀는 것조차 꺼리게 됐다. ‘낙태 커밍아웃’도 얼마 전 친구 1명에게만 했다고 한다..
우리는 2년 사귄 27살 동갑내기 연인이었다. 같은 집에 살며 밥을 지어 먹었다. 밤새 농담을 주고받았다. 예전 연인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눴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하루는 유난히 어지럽고 속이 울렁였다. 그 사람과 날짜를 손으로 꼽아보다 멈칫했다.
“임신인가?”
“아니야. 임신한다고 바로 입덧하고 그러진 않아.”
“어떻게 알아?”
그에겐 낙태 경험이 있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 2명이 낙태를 했다고 한다. “임신이 아닐 것”이라는 그의 위로에 안도감과 함께 마음이 복잡해졌다. ‘옛날 일이니까…’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하지만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임신 했다”는 말에 그는 의외로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낳자. 좋은 아빠가 될게.”
하지만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매달 적자였다. 남자친구는 학생이었다. 출산은커녕 낙태 비용도 빌려서 내야할 판이었다. 낳을 자신도 없고 낳고 싶지도 않았다. 서둘러 수술을 받기로 했다.
“피임을 잘 했어야죠.”
의사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임신은 둘의 책임이지만 수술대에 오른 건 나뿐이었다.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수술 후 그와 함께 살던 집은 살얼음판이 됐다. 나만 피해를 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사람만 낙태 사실을 알고 있어 다른 곳에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낙태 이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안 하던 밥을 짓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미역국을 끓였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나를 집에 두고 학교에 갈 때면 그는 죄인이 됐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누워있어야 되는데 너는 왜 그리 늦게 다니는 거야?” “…”
“지금은 내가 1순위여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는 예전 여자친구에 대해 “히스테리가 심해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함께 그 여자 흉을 봤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그 여성처럼 되어있었다. ‘왜 나만 힘들지’ 하는 생각에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뒤 그에게 한계가 왔다. 그날도 그는 서툰 솜씨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하지만 매일 끓여오던 미역국이 빠져있었다.
“미역국 한 끼만 더 먹고 싶어.”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적당히 좀 해.”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우리가 서로 뒷걸음치며 멀어져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둘 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보호자시죠? 임신 7주차고요, 동의하시는 거죠?”
“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회사원 김모 씨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대기실에 앉았다. 소파에는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이 여럿 있었다. 남성은 김 씨 뿐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여성은 대전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는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다. 석 달 쯤 만난 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였다. ‘자취방에서 혼자 몸조리는 잘 할 수 있을까.’
수술실에서 나온 여성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차마 “고생했다”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뭐라도 좀 먹을래?”
“그냥 친구랑 먹고 싶어.”
그 말이 김 씨가 여성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여성을 낙태 시킨 기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 씨는 반년 쯤 지나 새 연애를 시작했다. 사이가 무르익자 함께 모텔에 갔지만 그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나지 못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지만 김 씨에겐 불가능했다.
김 씨는 비뇨기과와 신경정신과를 찾아다녔다. 의사의 조언대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여자친구와 여행지로 떠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 여성의 인생을 바꿔놓은 그날 밤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10년 전 수술을 마치고 헤어졌던 그날, 여성으로부터 날아든 단 한 줄의 문자메시지를 김 씨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여성은 김 씨에게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쉼 없이 김 씨를 밀어낼 뿐이었다.
여성의 문자는 김 씨의 죄책감을 수시로 소환해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며 여성을 안심시켰던 그날 밤 자신을 향한 환멸도. 올해 37세인 김 씨는 그 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대한민국도 하루빨리 낙태죄가 폐지되어 여성에게 선택권이 생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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